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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정상을 바라보니 숙연한 생각이…

우리는 서울과 홍콩을 경유해 3월 30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카트만두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네팔 공산당 마오이스트들 때문에 도시는 계엄 하에 있었고, 산발적인 데모는 그치지 않았다. 상가도 철시되고 생필품 품귀 현상도 나타났다. 도로 곳곳에는 군경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도 보였다. 그러나 관광이 주 수입원인 탓에 정부군도 '마오바디'라 불리는 반군도 외국인들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계엄 하에서도 길가에 어슬렁거리는 소와 개, 지저분함과 분주함은 그대로였다. 빨리 혼란스러운 카트만두를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한국산악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김치를 사고, 재래시장에서 쌀과 채소, 그릇을 구입했다. 그리고 경비행기로 쿰부계곡 들머리 루크라까지 이동했다. 40분간 비행하는 낡은 비행기 창밖으로 장엄한 히말라야산맥이 보였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에베레스트를, 나는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은 양쪽에서 달려와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저 산이 세븐 서밋의 마지막 봉우리라고 생각하니 투지가 솟아올랐다.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경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루크라에 착륙했다. 히말라야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두드코시 강이 보였다. 깊은 계곡 분지에 자리한 루크라는 해발 고도가 높아 벌써 서늘했다. 우리는 쿰부 히말라야를 관통하는 두드코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카라반에 나섰다. 이 강은 우리가 가야할 에베레스트 쿰부 빙하에서 발원하니, 강이 끝나는 곳에 베이스캠프가 있을 터였다. 셰르파 부족들의 정신적 고향 남체바잘(해발 3400m)은 쿰부계곡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는 곳이다. 가파른 사면을 깎아 만든 마을엔 카트만두나 티베트에서 온 물건들로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히말라야 깊은 계곡에 샹그릴라와 같은 마을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셰르파의 고향은 원래 티베트다. 이들은 500여 년 전 내전을 피해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 이 쿰부 지역에 정착해 비탈 밭과 야크를 키우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 히말라야를 찾는 원정대에게 발탁돼 짐꾼과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산족답게 고소증에 강하고 성실함과 강한 체력이 서양인 눈에 띈 것이다. 그런 셰르파들의 활약으로 1953년 영국 팀은 에베레스트 첫 등반이라는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첫 등반을 기록한 덴징 셰르파도 이곳 쿰부 출신이다. '제한 없는 팀'의 사다도 같은 마을 출신인 아파 셰르파다. 사다란 네팔 스텝들 중 리더를 가리키는데, 아파는 이미 셰르파 부족뿐 아니라 네팔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내가 더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아파 셰르파 때문이었다. 경험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더군다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등반에 있어 경험은 생존율을 높이고 성공을 담보하는 보석이라 할 수 있다. 남체를 떠나 풍기텡카라는 마을을 지나고 탕보체에 올랐을 때, 그 동안 계곡에 숨어 있던 에베레스트 정상부가 빠끔하게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앉아 삼각형으로 검게 솟은 아득한 에베레스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다른 산에 가려져 더는 에베레스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도 1캠프에 올라야만 정상부를 볼 수 있다. 비현실적으로 솟은 저 삼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야한다는 생각에 공연히 숙연해졌다. 뎅보체라는 마을에서 두드코시 강을 건너는 첫 번째 출렁다리를 만났다. 아슬아슬한 현수교에는 티베트 불경이 적힌 오색 룽따가 무수하게 걸려 있고, 밑으로는 뿌연 물이 기세 좋게 흘렀다. 빙하로부터 발원하기에 물빛이 뿌연 것이다. 그래서 셰르파들은 이 강을 두드, 즉 '우유' 빛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룽따의 '룽'은 바람, '따'는 말(馬)을 뜻한다. 셰르파들은 불경이 빼곡히 적힌 오색 룽따를 어느 곳에나 걸어 놓는다. 바람이 불면 깃발이 흔들리고, 그러면 그 자체가 불경을 읽는 것이라고 믿는다. 룸따는 영어로는 바람의 말, 윈디 호스(Wind Horse)라고 한다. 다리를 건너자 쿰부 계곡의 상징처럼 알려진 아름다운 봉우리, 아마다블람이 나타났다.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만년설 면사포를 쓴 듯한 아마다블람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마는 '엄마', 다블람은 '목걸이'라는 뜻이다. 어머니의 목걸이처럼 주봉과 연결된 작은 봉이 있다. 쿰부 히말라야는 산만 높은 게 아니라 고도를 높여가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수림이 우거진 깊은 정글이 나오는가 하면, 에베레스트에서 발원한 우윳빛 강이 아득한 깊이로 계곡을 만든다. 누추하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롯지가 곳곳에 있어 가끔 그곳에서 전통차를 마시곤 했다. 열심히 걷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에 몸을 녹이면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어 행복했다. 쿰부 계곡 카라반은 즐거운 여정이었다. 점차 고도를 올려 4200m의 페리체 마을에 도착할 무렵 우리는 수목한계선을 넘고 있었다. 대원들 중 몇 명은 고소증을 호소했고, 나 역시 경미한 두통에 시달렸다. 지금부터 고소증과의 싸움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긴장된다. 키 작은 관목류만 듬성듬성 있는 페리체 벌판이 아주 넓어 보인다. 그 길을 필시 베이스캠프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야크 떼가 줄지어 걷고 있다. 볼 빨간 셰르파 소녀가 휘파람을 불며 야크 떼를 몬다. 야크는 등마다 원정대에 가져다 줄 보급물품을 잔뜩 싣고 있다.포터들은 1인당 30kg의 짐을 운송하는데, 야크는 한 마리가 60kg을 나른다. 야크목에 걸린 쇠방울이 딸랑거리며 느릿한 걸음에 박자를 맞춘다.

2016-02-03

제한 없는 팀(Team No Limits)…9명의 팀원, 베이스캠프서 첫 대면

사람은 어떤 만남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것이 설사 작은 계기라도 운명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나는 2002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봉을 오를 때 미국 산악인 한 명을 만났다.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더그 투미넬로가 바로 그다. 더그는 지금 우리 팀 리더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하다 변호사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그는 등반 잘하는 변호사로 미국에서 잘 알려진 산악인이었다. 그런 더그와 나는 같은 날 함께 정상에 올랐다. 더그 역시 내가 추진하고 있는 7대륙 최고봉 등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산에서는 금방 친해진다.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이다. 등반은 무상의 행위다. 산에서는 경쟁이 없기 때문에 동지애마저 느낀다. 매킨리 등반은 힘들었다. 하기야 쉬운 산이 있을까마는, 나는 빙하가 갈라진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구조되기도 했다. 고산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엿본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우리 둘은 거기서 허물없이 친해졌고, 일상으로 복귀한 뒤로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더그가 놀라운 제안을 해왔다. 에베레스트에 가자고. 자신이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만들었는데, 나도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더그가 만든 원정대의 이름은 재미있었다. '제한 없는 팀(Team No Limits)'. 제한이 없다는 것은 극한의 모험과 등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자기 능력껏 해보라는 뜻도 내포돼 있었다. 능력이 있어 정상을 올라야겠대면 도전하는 것이고, 한계치까지 노력하다 안 되면 그만두어도 좋다는 팀. 아주 흥미로웠다. LA에서 내가 소속된 재미한인산악회에도 에베레스트 원정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나는 2001년 에베레스트 근처에 있는 해발 6201m의 아일랜드 피크에 올랐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정찰을 왔었다. 히말라야 원정은 오히려 등반보다 그 준비 과정과 행정처리가 더 힘들다는 걸 그때 알았다. 원정경비도 문제였다. 에베레스트 입산료는 원정대당 5만 달러였고, 대원 수는 5명으로 제한되었다. 1명이 추가되면 1만 달러를 더 내야 한다. 나 혼자 등반해도 팀으로 간주돼 5만 달러를 내야 한다. 세계 산악인들은 폭리에 가까운 입산료에 항의했지만 네팔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비싼 입산료 때문에 에베레스트를 찾는 산악인들이 대폭 줄어들 것이란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산, 제3의 극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더그 역시 경제적인 점에 착안해 콜로라도 산악인 3명과 함께 팀을 꾸려 나를 부른 것이다. 경제적으로 에베레스트 입산 허가를 받고, 셰르파나 주방장 같은 고용인 경비는 공동으로 부담하자는 제안이었다. 또한 변호사답게 행정 처리도 대행해주겠다고 했다. 이미 덴마크인 두 명과 캐나다인 한 명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나는 같은 산악회원이자 오랜 친구인 이정현과 상의했다. 정현은 에베레스트는 너무 높으니 자신은 세계 4위 봉 로체봉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봉은 직선거리가 3km밖에 안 된다. 3캠프까지 등반 루트도 같다. 나는 더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제한 없는 팀' 원정대에 행정상 합류는 하되, '재미한인산악회 원정대'로 참여하겠다고도 했다. 더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5년 10월, LA에서 열린 산악회 정기총회에서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파견이 결의되었다. 그리하여 미주 한인 산악인들이 해외동포 최초로 단일팀을 만들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게 되었다. 1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6년 3월 원정대 발대식이 열렸다. 대장은 내가 맡았다. 대원은 총 9명. 나와 동료 이정현이 에베레스트와 로체 등반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5300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만 오르고 하산하기로 계획됐다. 발대식장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해외교민 사회에서 처음 시도되는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장도(壯途)를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 우리는 LA를 출발해 네팔로 떠났다. 이제 대장정의 시작이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우리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제한 없는 팀' 대원들도 만날 것이다.

2016-01-27

"내 나이 예순 넷, 칼날 능선 12시간 오를까"

이번에 연재하는 '나의 에베레스트'는 2006년 김명준(사진)씨의 에베레스트 등반기를 엮은 책으로 지난 2013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전에서 우수작에 선정된 작품이다. 산악인 김명준씨는 '7대륙 최고령 완등자'로 지난 2007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2014년에는 7대륙 최고봉 등정을 포함한 그의 도전을 담은 '라이프 노 리미츠'를 출간하기도 했다. "노 굿 웨더 위 캔 낫 클라이밍(No good weather We can not climbing)" 내 텐트로 건너온 아파 셰르파(Apa Sherpa)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고. 두꺼운 우모(牛毛)복을 입은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어도 이미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 지 오래다. 아파 셰르파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느라 산소마스크를 잠시 벗었을 뿐인데도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곳은 신들의 영역이라는 해발 8000m의 사우스 콜이 아닌가. 산소도 지상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죽음의 지대. 인공산소를 마시고 있다 해도 산소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는 평지와 같을 수는 없다. 이곳 마지막 4캠프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동남릉은 네팔과 티베트를 가르는 경계다.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산(高山)에서 무리한 욕심은 죽음을 낳는다. 이미 많은 경험과 자료를 통해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가. 첨단 과학이 동원된 점보비행기가 날 수 있는 고도를 나는 순전히 내 발로 올라왔다. 눈앞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포기하기엔 억울하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변방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네팔까지 물리적인 거리도 멀지만 그것만이 억울한 감정의 전부가 아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지난 10년간 지독한 훈련을 해왔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고 주말 훈련 산행을 빼먹지 않았다. 이 산에 오기 직전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고소증에 대비하려고 LA에서 가까운 멕시코 최고봉에도 올랐다. 지금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에서 올 나의 무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동료 이정현과 함께. 이번 등반의 목적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기록 경신도 포함되어 있다. 훈련 기간을 뺀 지난 6년 동안 여섯 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올랐다. 1999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963m)에서 시작해 남미 아콩카구아(6959m) 유럽 엘브루스(5642m) 북미 매킨리(6194m) 남극 빈슨매시프(4897m) 오세아니아 칼스텐츠(4884m)를 차례로 올랐다. 이제 아시아의 에베레스트만 남았다. 이 산을 오르기만 한다면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긴 여정에 비로소 끝이 난다. 또한 이곳 8000m 최종 캠프에 닿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베이스캠프에서 1캠프 2캠프 3캠프를 오르내리며 한 달 넘게 전투처럼 등반해왔다. 정말이지 너무도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악마의 입 같았던 얼음폭포 아이스폴에서의 사고. 얼음기둥이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 팀 셰르파 두 명을 잃었다. 그런 희생과 고생을 감내하며 겨우 오른 마지막 캠프에서 그만 멈춰야 하다니. 오르고 싶다. 7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오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세븐 서밋(Seven Summit)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세븐 서미터가 되기 위해 에베레스트의 위험에 맞설 의지와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히말라야 등반은 하늘이 도와줘야 한다. 아무리 준비가 철저하더라도 오늘처럼 일기가 나쁘면 등반은 끝이다. 눈보라가 계속되면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하산조차도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억울하지만 신뢰하는 파트너 아파 셰르파의 경험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 그는 이미 에베레스트를 15번이나 올랐고 네팔에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셰르파이기도 하니까.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고산등반에서 욕심은 죽음과 항상 붙어 다닌다. 특히 성층권이 가까운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네팔에서 불어와 이 고개를 넘어 티베트로 달리는 바람은 쇳소리를 낸다. 물어뜯고 할퀴고 모든 걸 날려 버리려는 바람 탓에 꽁꽁 얼어붙은 텐트는 쉬지 않고 서걱거린다. 두꺼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파고드는 추위는 어쩔 수 없다. 숨 때문에 텐트 안을 온통 코팅시켜 버린 성애가 내 헤드램프 불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인다. 따듯한 차 한 잔이 간절하게 그립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하루 종일 굶었다. 낮은 기압 때문에 밥맛도 없지만 오래 전부터 불어터진 입술로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어도 쓴 맛이 난다. 그래. 어쩌면 잘 된 일인지 모른다. 내 나이 예순 네 살. 지금을 위해 단련해온 체력엔 자신 있으나 성공 여부는 모를 일이다. 날이 좋아 예정대로 출발했더라도 밤새워 위험천만한 고공의 칼날 능선을 가야 한다. 12시간쯤 실수 없이 형극의 길을 올라야 정상이다. 무사히 정상에 오른다는 보장도 없으니 억울해하지 말자. 아파 셰르파의 등반 포기 선언은 나를 살리려는 어떤 운명의 계시인지도 모른다. 잠을 잘 형편도 안 되니 가물거리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무엇이든 생각해야 한다. 그래 이 사우스콜로 올라오기까지 힘들었던 오늘 낮을 생각해보자. 내가 4캠프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였던가? 아니지 2시가 넘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이곳 8000m까지 올라왔지?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오른 셰르파들이 드넓은 사우스콜에 두 동의 텐트를 치느라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바람을 피한다며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멀건이 그들을 바라만 봤다. 티베트로 넘어가는 미친 바람이 텐트를 빼앗아가려는 듯 세차게 불었다. 텐트는 잔뜩 부풀기만 할 뿐 도무지 작업에 진척이 없었다. 겨우 텐트가 완성됐고 셰르파들은 내게 그 속에 들어가 쉬라고 손짓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침낭 속에서 잠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무중력 속을 헤매는 중이다. 베이스캠프가 그립다. 지금쯤 더그는 베이스캠프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곳을 떠난 지 사흘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 좋은 그가 무척 보고 싶다.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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